[매경포럼] 5만원권 화폐, 50원으로 바꾼다면…
340 1938 2015-04-21
1원 또는 5원짜리 동전을 최근 본 일이 있는가. 또 얄팍해진 10원짜리는 생소하지 않은가. 더 큰 돈만 좇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이런 동전들이 멀어졌다. 알고 보니 이미 오래전 변화다. 한국은행은 2006년부터 1원과 5원짜리 동전 발행을 중단했고 그때부터 10원짜리 동전 크기는 1원짜리처럼 줄였다.

신용카드 탓에 이런 변화에 둔감했을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국고금 수납에서 10원 미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기초연금 지급액도 100원 단위로 갈무리한다. 커피전문점 가격표에는 3.5와 같은 숫자가 나붙는다. 3500원을 그렇게 표현한단다.

다른 한편에선 `경(京)`이라는 단위가 튀어나온다. 국내 파생금융상품 거래 규모는 2002년 1경1500조원을 기록했다. 총금융자산, 국민순자산 등도 차례로 1경원을 뛰어넘었다. 이 어마어마한 숫자를 국제사회에 설명하려면 외국인들도 어려워하는 `쿼드릴리언(quadrillion)`이라는 단어를 등장시켜야 한다.

우리나라 화폐 단위는 1962년 화폐개혁 후 50여 년째 고정돼 있다. 그동안 경제 규모가 600배 이상 불어났으니 부조화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한국은행이 화폐 단위 변경 문제를 정식 추진하고 나선 건 2002년 일이다. 노무현정부 인수위원회도 이 문제를 검토했다.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와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는 2003년 교감을 이루는 듯했다. 최종 결단만 남은 것 같던 그 순간 부동산 값이 들썩이자 제동이 걸렸다. 이처럼 화폐 단위 변경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은 집값을 비롯한 물가 상승 우려였다.

화폐 단위 변경이 무산되자 2009년부터 5만원권이 발행됐다. 연간 수천억 원에 이르는 수표 발행·관리 비용을 줄이려는 응급처방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5만원권은 그 자체로 기록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발행하는 화폐 중 최고 액면권이다. 지구촌 전체로 봐도 베트남 50만동과 인도네시아 10만루피아를 제외하면 최고액권이다. 미화 1달러를 환산해보면 우리 화폐 단위는 돋보인다. 유럽에서 0.92유로, 중국에서 6.22위안, 러시아에서 57루블, 인도에서 62루피, 일본에서 120엔인 1달러가 한국에선 1100원으로 환산된다. 1달러를 네 자릿수 화폐 단위로 환산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도 몇몇 곳에 불과하다.

올해 2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거의 16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다. 담뱃값을 인상하지 않았다면 물가상승률은 제로가 됐을 것이다.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물가 상승을 걱정하느라 화폐 단위 변경을 포기했던 10년 전과는 경제 환경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화폐 단위 변경에는 이런저런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게 사실이다. 화폐를 재발행하고 현금인출기·자동판매기를 교체하고 회계·재무 시스템을 변경해야 한다. 이런 일로 국민이 불안해하면 소비 심리는 더욱 위축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 논리도 가능하다. 현금인출기·자동판매기 생산·수리 업종은 단기 호황을 맞는다. 화폐에서 0을 몇 개 제거하면 재무, 회계, 금융 업무는 장기적으로 더 효율화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고 강조해왔다. 실상은 다르다. 5만원권 100장을 시중에 풀면 그중 77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어느 마늘밭에서 쏟아져나왔던 5만원권 110억원은 지하경제의 속살이다. 화폐 단위를 변경하면 이런 지하 자금이 신권 교환을 위해 잠시나마 햇볕 아래로 머리를 내밀 것이다.

화폐 단위 변경은 다루기 힘든 초대형 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연구와 논의를 거쳤다. 정부가 관리하기에 따라서는 디플레이션 우려를 씻고 소비·투자를 자극하면서 지하경제까지 제어하는 특단의 한방일 수 있다. 금융실명제를 단행할 때처럼 전광석화 같은 결단력과 지도력이 있다면 말이다.

[매일경제 & mk.co.kr] 기사입력 2015.03.30 17:2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