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화폐문화
5474 2004-11-16
일본의 화폐단위가 현행 체제로 된 것은 1958년에 만엔권이 등장한 이래로,1984년에 전면 갱신되었고 올해 11월로 3번째 신지폐가 제조되었다. 그렇게 보면 일본화폐 갱신주기가 20년 전후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일본의 신지폐 예산은 3000억엔으로 추산된다. 불경기에 거액의 투자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는 비판도 있을 법하다. 일본의 신화폐 발행 명분 하나는 위조지폐 방지다. 또 하나의 명분은 경기회복이 목적이다. 화폐발행 특수에 의한 8000억엔의 경제적 효과를 내다보고 있다. 또한 장롱 속의 돈을 신화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소비가 증가하게 되고 국민재산을 파악하게 되면 정확한 세금징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화폐의 완전 회수 계획은 2년으로 보고 있다는 설이다.

화폐인물은 대체로 많은 나라에서 화폐의 초상화로 정치인을 등장시킨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이다. 1930년 100엔권에 사용되면서 1958년에 1만엔권에 이르기까지 계속 등장하여 1984년까지 54년간 사용되었다. 일본 고대헌법의 창시자 쇼토쿠타이시는 고구려 고승 혜자(惠慈)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 우리 역사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1984년엔 만엔권이 쇼토쿠타이시에서 근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로 바뀌면서 1963년부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상화가 실렸던 1000엔권이 근대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礎石)로 바뀌었다. 이때에 화폐인물이 정치인에서 문화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헌법을 기안한 자이지만 우리 한국인이 혐오하는 침략자를 화폐에서 사라지게 한 것은 한·일친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행스러운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이 시기에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이 1000엔권 거스름돈이 들어오면 지갑에 넣기 싫어 들어온 즉시 마구 써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런데 현행 만엔권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한 인물이다. 일본이 문명개화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겐 중요한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국권론자로 기울면서 정한론(征韓論)에 불을 붙이고 청일전쟁을 강력하게 주창한 주전론(主戰論)자이다. 물론 그 시대 일본의 지도자들로서 정한론을 반대한 인물은 거의 없다. 다만 시기적인 대립이 있었을 뿐이었다.

1984년에 5000엔권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국제연맹 사무총장을 지낸 니토베 이나조의 초상화가 실린다. 우리에겐 무사도를 쓴 인물이라고 소개를 하면 알기 쉽겠다. 이번에 신 오천엔권은 히구치 이치요라는 근대 여류작가이다. 5000엔권은 사용빈도는 적은 반면 시대의 상징성이 부과된 것일까. 1980·90년대 국제화시대를 표방하듯 니토 베이나조가 등장하더니 21세기 여성의 시대를 대표하듯 히구치 이치요가 등장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여성이 일본화폐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881년 최초의 초상화를 넣은 지폐에 진구(神功)황후(170∼269)가 실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19세기경부터 인물상이 사용되면서 초기엔 여신이나 수호신이 등장하였고 19세기 중엽부터 국왕,여왕,대통령 등 정치가의 초상이 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 서구제국에서 문화인의 초상이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980년 이후는 특히 여성의 초상이 증가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인물은 이번 신 1000엔권에 쓰인 인물은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이다. 과학자는 일본 화폐 초상화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노구치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어 태평양전쟁 이전부터 국정교과서에 실려 위인화된 인물이다. 황열병(黃熱病) 등을 연구한 의학자로 노구치에 관한 초등학생용 서적이 1970년대 많이 발간되어 의사가 되려는 젊은이가 많아지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화폐의 초상화가 된 과학자는 퀴리부인(프랑스),슈레딩가(오스트리아),프랑크(독일),라자포드(뉴질랜드) 등이 있다.

인물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인은 돈을 소중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단돈 1000엔짜리 한 장이라도 지갑에 보관하는 습관이다. 돈은 없어도 지갑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 조폐도 튼튼해야 하지만 사용하는 습관이 국고의 돈을 절약하는 것이고 경제력인 것 같다. 선진국에서 화폐의 지저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지저분해도 많기만 하면 된다는 의식이 앞선다. 지갑 속에 넣기 싫을 정도로 너무 지저분한 돈도 많다. 돈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얼굴이 지저분해서야 되겠는가.

박순애(호남대 일본어학과 교수)

[국민일보 2004-11-15 18:07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