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모든 지폐에 '여자'가 그려진 이유
79 5160 2009-07-10
마침내 한국 지폐에 여성이 등장했다. 그것도 가장 액수가 큰 지폐인 5만 원 권에 신사임당의 영정이 그려진 것. 이제까지 최고액권 지폐에 여성이 등장한 나라는 영국(1926년-현재)과 호주(1996년-현재) 뿐이었다.

프랑스 최고액권 화폐인 500프랑에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초상이 담겼지만, 공동 수상자인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나왔다. 그 외 지폐 모델로 여성이 등장한 나라는 대부분 사회주의권에 속한 나라들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군주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까지 여성 총리를 단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한 호주는 무슨 연유로 여성의 초상을 최고액 권에 담았을까.

단지 최고액권뿐만이 아니다. 호주는 시중에 유통되는 총 5종의 지폐에 모두 여성을 넣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기껏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인 것에 비춰보면 파격적이다.

호주의 모든 지폐에는 '여자'가 있다

호주 최고액권인 100호주달러(약 10만원)에 등장하는 여성은 소프라노 가수 넬리 멜바(1861~1931)이다. 그녀는 20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오폐라계의 디바다. 20세기 오페라의 본좌 '코벤트 가든의 여왕'인 것.

멜바의 아버지는 베이스 가수였고, 어머니는 음악교사였다. 호주에서 성악의 기초를 닦은 멜바는 1886년 영국과 유럽에서 최고의 콜라투라 소프라노로 등극했다. 특히 그녀는 오페라 아리아를 부를 때, 음이 샤프되거나 플랫되지 않는 정확한 음정을 구사해 '신이 내린 가창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당시 런던, 파리, 뉴욕으로 이어지는 멜바의 인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각종 상품에 그녀의 이름이 활용됐고, 하물며 그녀가 즐겼던 칵테일과 토스트는 '피치 멜바'와 '멜바 토스트'로 불릴 정도였다. 유럽과 미국에서 '멜바 극장'이 연이어 문을 열었을 때는 당대 오페라 작곡가 구노, 베르디, 푸치니 등이 그녀와 아리아를 상의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진다.

함께 오페라 무대에 올랐던 테너 카루소가 시기심을 느낄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멜바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소프라노였다. '코벤트 가든의 여왕'이었던 그녀의 음반을 내기 위해 <그라마폰 레코드사>가 오케스트라를 그녀의 저택으로 보내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후에도 몇 년을 더 협상해서 음반을 출시할 정도였다고. 그녀의 마지막 협상조건은 음반 가격사상 최고액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멜바는 조국 호주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작은 규모의 자선공연에도 기꺼이 참여했고, 학생이 몇 되지 않는 <멜버른 음악원>(Melbourne Conservatorium of Music)에서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 학교는 지금 <멜바 음악원>으로 불린다.

특히 그녀는 헬렌 미첼이라는 본명 대신 '멜버른 출신의 디바'라는 뜻의 닉네임 '멜바'를 사용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정이 애틋했다. 1931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는 20여만 명의 조문객들이 몰려들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1996년에 멜바의 초상이 최고액권 지폐에 등장하자 호주 국민들은 크게 환영했다. 특히 멜바의 대를 이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존 서덜랜드는 2002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멜바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자긍심으로 노래했다"면서 "그래서 호주 $100짜리 지폐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최고액권에는 오페라 디바, 절반은 가난뱅이 시인들

호주 지폐에는 문학가들도 많이 등장한다. 호주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9명 중에서 무려 5명이 내로라하는 문학가들이고, 그중 3명이 시인이다. 그런데 시인들이 누구인가. 청빈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가난뱅이들이 아닌가.

호주 10달러짜리 지폐에 가장 먼저 등장했던 시인은 헨리 로슨이다. 그는 한평생을 '스위그맨'(떠돌이)으로 떠돌아다녔던 방랑시인이었다. 말년에는 시드니 길거리에서 구걸한 돈으로 맥주를 마시곤 했다. 결국 헨리 로슨은 오페라하우스 근처의 풀숲에서 객사했는데, 당시 찌그러진 양은 맥주잔을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투사 시인' 메리 길모어다. 그녀는 호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차별에 온몸으로 맞섰던 평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가축들도 포함됐던 호주 인구조사에서조차 제외됐던 원주민들과, 참정권은 물론이고 대학입학조차 불가능했던 여성들을 위해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그녀에게 문학은 평등 쟁취를 위한 투쟁의 도구였다. 그러나 불평등의 원인이 탐욕스런 자본주의에 있다고 판단한 메리 길모어는 이상적 공산주의 실천을 위해서 한동안 호주를 떠나 파라과이에 머물렀다.

원주민 시인 데이비드 우나피온의 스토리 또한 딱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백인들에게 강탈되어 기독교 미션에 맡겨졌던 '훔쳐진 세대'(Stolen Generation)였다. 그는 생면부지의 부모님과 고향마을 풍경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려내어 시와 소설로 썼다. 그는 최초의 작품집을 발간한 원주민으로 기록됐다.

우나피온의 상상력은 과학으로도 연결되어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특히 원주민의 사냥도구인 부메랑의 역학(the aerodynamic of the boomerang) 연구로 헬리콥터 발명에 영감을 준 일화는 유명하다.

호주 지폐에 부자들은 없을 수밖에

호주 지폐에 등장하는 호주인들은 누구?

최고액권인 $100짜리에는 전설적인 소프라노 가수 넬리 멜바(1861-1931)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이면서 엔지니어였던 존 모나쉬(1865-1931)의 초상이 그려졌다.

$50짜리 지폐에는 애보리진 작가 데이비드 우나이폰(1872-1967)과 호주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었던 에디스 코완(1861-1932)의 초상이 담겼다. 코완은 한평생 여성과 어린이를 위해서 살았다.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것도 보다 효율적인 사회사업을 펼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20짜리 지폐에는 세계 최초로 항공기를 이용하여 의료서비스를 실시하는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The Royal Flying Doctor Service)를 창안한 존 프린 목사(1880-1951)와 위에 소개한 죄수 출신 사업가 메리 레이비(1777-1855)의 초상이 실렸다.

$10짜리 지폐에는 헨리 로슨에 이어서 '월씽 마틸다'의 시인 벤조 페터슨(1864-1941)과 메리 길모어(1865-1962)의 초상이 담겼다. 특히 $10 짜리 지폐의 양면에는 벤조 패터슨의 시 'The man from Snowy River'의 전문과 메일 길모어의 시 'The Wild Swan'의 전문이 실렸다.

$5짜리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 )의 초상과 연방국회의사당 전경이 그려졌다. 영국 여왕은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데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와 영국령에 속하는 20여국의 화폐에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

화폐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팔 때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호주의 지폐에는 호주 건국이념이면서, 동시에 220년 동안 국가이념으로 신봉해온 평등주의(egalitarianism)가 깊게 녹아들어 있다. 호주인들에게 평등주의는 오랜 내면화 과정을 거쳐 집단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호주의 민속신앙 같은 것이다.

18세기 후반, 성공한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의 그늘에서 잉여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 농촌출신 도시빈민들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고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서 옷가지를 훔쳤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한 몫 잡은 신흥 자본가그룹과, 부자들과 내통한 국가권력은 그들에게 평생 유배형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호주 평등주의 역사는 거기서 출발했다. 노동자와 무산계급이 피 흘리면서 반역의 역사를 청산해온 숨 가쁜 220년이다.

호주 최고 통치권자인 수상의 초상이 지폐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연히 부자들의 얼굴은 호주 지폐의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20달러짜리 지폐에 사업가 메리 레이비가 나오지만, 그녀는 제3차 죄수수송선단에 실려 온 죄수(convict) 출신이었다.

호주 지폐에 등장하는 9명 중에 5명이 여성인 것도 평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여권운동을 펼친 나라 호주답다. 여성의 투표권 행사만 뉴질랜드에 1년 정도 늦었을 뿐 실질적으로 여성참정권의 시대를 연 나라가 호주다.

세계 최초의 '플라스틱 돈' 찍어서 돈 버는 호주

시드니 중심가에는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금융가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중심에는 호주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이 있는데, 빌딩 1층에 호주 지폐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호주 지폐 박물관'을 큰 규모로 꾸며놓았다.

7월 3일 오후, 지폐박물관 회의실에서 역사담당관 제프리 코나스를 인터뷰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지폐 박물관'은 언제 개관했나.

"2005년 3월에 개관했다. 국민들에게 화폐 제조과정을 공개하자는 취지였다. 아울러 화폐의 변천과정이 경제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발전과는 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의미도 있었다."

-'지폐 박물관'의 전시물들에서 역사의 발자취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호주 화폐는 그 시대의 국가적 심벌이었다. 특히 호주의 국가이념인 평등주의를 계승한 당대의 인물과 예술인의 삶에 주목했다."

-대체로 지폐 속의 인물들한테 서민적 풍모가 느껴졌는데.

"호주는 사전적 의미의 영웅이 없는 나라다. 정치 지도자나 장군,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닌 '이름 없는 영웅들'이 호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들이 비록 방랑자였고, 공산주의자였을망정 당대의 심벌이었다면 기꺼이 지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5개 전시관 중에서 '새로운 시대'로 이름 붙여진 1988년 이후가 아주 흥미롭다.

"1988년은 호주뿐만 아니라, 세계 지폐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린 해이다. 호주연방과학연구소(CSIRO)에서 연구하여 세계 최초로 발명한 폴리머(polymer, 중합체라는 화학용어) 지폐가 선보인 해이기 때문이다. 일명 '플라스틱 머니'로 불리는 지폐다."

-폴리머 지폐의 특성은?

"폴리머 지폐는 플라스틱을 기본소재로 특수물질을 배합해서 만든다. 겉으로는 기존의 종이 지폐와 흡사하다. 제작 단가는 2배지만 종이지폐에 비해 수명이 4배나 길고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호주에서 위조지폐 사건이 많이 발생해서 얻어진 결과 아닌가?

"상상에 맡기겠다. 그러나 칼라복사기가 발달하면서 위험성이 아주 높아졌다. 그래서 지폐 귀퉁이에 투명창(clear window) 등을 만들었지만 종이 지폐로는 한계가 있었다. 호주도 종이 지폐 시절에는 미국 달러만큼이나 위조지폐로 골머리를 앓았다."

-현재 호주는 전부 폴리머 지폐만 사용하고 있는데, 위조 사건이 줄어들었나?

"지폐 위조 자체가 불가능하다. 종이 지폐는 잉크가 쉽게 스며들지만 '플라스틱 머니'에는 잉크가 스며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폴리머 지폐 개발 이후 위조지폐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폴리머 지폐의 장점과 단점을 소개한다면.

"종이 지폐는 수분이 흡수되기 때문에 세균에 오염될 가능성이 높지만 폴리머 지폐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또한 기름때나 화학약품으로 인한 훼손이 거의 없다. 그러나 폴리머 지폐 플라스틱 소재의 특성상 열에 약하고 한 번 접히면 잘 펴지지 않는 단점이 있다."

-수명이 다한 폴리머 지폐는 플라스틱 재활용이 가능한가?

"종이 지폐는 수명이 다하면 매립하거나 소각해야 하지만, 폴리머 지폐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실제로 폴리머 지폐를 잘게 썰어서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재료를 만든다. 친환경적인 효과가 아주 크다."

-폴리머 지폐를 수출해서 수익을 크게 올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호주 지폐는 <연방준비은행> 산하 <호주 지폐 인쇄소>(Note Printing Australia)에서 제작하는데,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아서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쿠웨이트, 인도네시아, 칠레, 멕시코, 싱가포르, 태국 등 23개국의 지폐 제작을 대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