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의 뒷면
66 3826 2009-03-30
올 6월 발행 예정인 5만원권의 도안이 공개됐다. 한국 화폐사상 최초로 발행되는 고액권에, 도안의 주인공도 여성인 까닭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람들의 관심은 앞면의 사임당 영정에만 집중돼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런데 새 5만원권의 뒷면을 눈여겨봤다면 기존의 돈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놀랐을 것이다. 교교한 달빛 아래 하늘로 가지를 뻗은 매화나무와 세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대나무의 모습이 세로로 들어가 있다.

현재 200여국에서 발행해 사용되는 돈 가운데 세로형의 지폐는 그리 많지 않다. 스위스·이스라엘·볼리비아 등이 대표적인 세로 화폐 발행국이다. 특히 스위스 은행권은 디자인이나 안전면에서 최고의 화폐로 평가받고 있다. 디자인 강국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대담한 구도와 아름다운 색상으로 주목을 끈다. 화폐 수집가들은 물론이고 디자인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스위스 화폐 디자이너 레옹 스톡의 명성은 단연 세계적이다. 우리나라의 한 카드사에서도 그에게 카드 디자인을 맡겨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세로로 디자인된 화폐와 기존의 가로 화폐 중 어느 것을 더 선호할까. 아무래도 주고받을 때는 세로 디자인의 화폐가 사용에 더 편리할 것이고, 돈의 액수나 도안을 정확히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화폐금융박물관 백남주 학예사
처음 접한 외국 돈 분석이 취미
스위스·네덜란드 매우 독창적
5만원권 논란 “본질 무시한 것”

“돈 전문 큐레이터의 눈엔 돈이 돈으로 안 보여요.”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백남주(42) 학예사. 국내외 돈을 세세히 뜯어보는 게 일이다. ‘돈박사’인 그는 돈정보도 빠삭하다. 돈 굴리는 법 같은 류가 아니라 돈 보는 법이다. 그에게 돈은 상거래 수단이 아니다. 디자인의 최정점이다. 그래서 “작은 사각형 지폐, 원형의 동전 안에 어떤 인물과 도안을 넣느냐는 그 나라 문화·디자인의 척도”라며 “디자인 강국의 최후 도달점은 화폐”라고 역설한다. “아시아 각국의 화폐는 아직 비슷비슷하게 한쪽에 인물이 들어간 형태지만 스위스·네덜란드 등 문화강국이라는 나라의 색감이나 디자인은 독창적이고 통일성이 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러다보니 매일 국내외의 돈을 보고 만져도 액면가에 대한 감흥은 크지 않다. 이 박물관서 가장 비싼 돈은 일제 시대에 만든 금화다. 희소성이 높아 경매에서 1억원에 낙찰됐다. 그러나 그는 “1억원 상당의 금화를 보면서 금화가 아니라 1억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면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라는 반응이다.

미술사학도인 그는 화정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뒤 한국은행에 새로 생긴 화폐금융박물관에 2003년 최초이자 유일의 학예사로 입사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 시절부터 소장돼 있던 구권 화폐와 한국은행이 해외의 중앙은행들과 연계해 수집한 화폐 자료를 새삼 들여다봤다. 국내 화폐의 역사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어 애를 먹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야 하는 어려움에는 재미도 따랐다. 이제 그는 외국돈을 처음 접하면 ‘무슨 내용을 담은 걸까’ 뜯어보기부터 한다. 나라마다 화폐에 자국의 대표 이미지를 넣고자 고심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최근 신사임당 초상화가 들어간 새 5만원권 도안을 두고 벌어진 논란에도 할 말이 많다. 사임당의 진외가(陳外家)와 한 영문과 교수 등이 어깃장을 놓았다. “표준영정과 다르다”“기생·주모같다” 따위의 이유였다. 이에 대해 백씨는 “본질에 집중하지 않는 비전문적 논란에 화가 났다”고 일축했다. “문화부 공인 초상화일 뿐인 표준영정에 대한 집착은 차치하자. 이번 논란은 전통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를 그대로 보여줬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궁중 문화로 사대부가에서 따라하던 사치스러운 장식 풍토인 가채(올림머리)를 기생이나 주모 머리라고 치부하는 것부터가 그렇다”는 얘기다.

중앙일보 원문 기사전송 2009-03-23 02:43 최종수정 2009-03-23 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