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최단명’ 女 화폐 모델, 그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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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원문 기사전송 2009-03-06 13:11 최종수정 2009-03-0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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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속 인물이 누군지 알아?”
“나도 처음 보는데…. 혹시 ‘그 분’의 부인이 아닐까?”

‘모자상’을 새겨넣은 100환<사진제공=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1962년 5월, 한국은행이 새로 발행한 100환 지폐에는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색동옷 차림의 아들이 저축통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자(母子)상’이 그려져 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골몰해있던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는 범국민 저축운동을 전개했고 화폐에도 저축 장려를 상징하는 도안을 넣으려 했다. 화폐 발행 후 그림의 실제 모델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부인과 아들이며 부하들의 충성심이 두 모자를 선정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무명 모델 ‘어머니’…최단명 화폐

선덕여왕(2500원), 유관순 열사(50원)가 1970년에 기념주화로 등장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여성 화폐 모델은 바로 이 100환 지폐에 그려진 ‘어머니’다. 한국은행이 국내 지폐 도안에 무명의 인물을 채택한 것은 이것이 유일무이하다. 100환의 ‘모자상’ 모델은 권력자의 부인도 순국열사도 아닌 조폐공사에서 근무했던 여성과 그의 아들이 실제 모델이다.

한국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결혼 후 조폐공사를 그만둔 이 여성은 어느 가을 날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조폐공사 도안실장으로부터 ‘사진을 찍어줄테니 덕수궁에 와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두 살배기 아들을 업고 나간 그는 사진을 다 찍은 후에야 그것이 새로 만들 화폐에 쓰일 사진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된다.

오는 6월 발행 예정인 5만원권의 신사임당 보다 47년이나 앞서 우리나라 최초 여성 화폐의 주인공이 된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올해 나이 70세인 권기순씨는 현재 아들과 함께 서울 오장동에서 냉면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은 오장동 3대 냉면집의 하나로 입소문이 나고 여러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맛집’으로 손꼽힌다.

이(李)씨도, 남성도, 조선시대 인물도 아닌 평범한 여성을 그려 주목받은 100환 지폐. 그러나 이 지폐는 세상에 태어난 지 20여일만에 제3차 화폐개혁 때 폐기되는 비운을 맞는다. 국내 화폐 역사상 ‘최단명 화폐’가 된 셈이다. 이에 화폐수집가들이 손에 넣고파 하는 희귀 화폐가 됐다.

북한 지폐엔 ‘꽃파는 처녀’가

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성 인물들이 화폐에 등장했다. 북유럽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5대 5의 비율로 화폐 인물로 채택되고 있다. 미국 달러의 초상 인물도 남성 정치인 일색이지만 2000년 발행됐던 1달러 동전에는 미 서부지역 탐험에 나선 탐험가를 안내했던 인디언 소녀 사카가웨아가 모델로 등장한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영국), 과학자 마리 퀴리(프랑스), 의사이자 교육가인 마리아 몬테소리(이탈리아),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셀마 라겔뢰프(독일), 독립운동가 튜트 낙 디엔(인도네시아)…. 이처럼 지폐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정치, 예술, 과학, 교육 등의 방면에서 화려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퀴리는 프랑스는 물론 고향인 폴란드의 화폐에도 새겨져 있다. 화폐에 여성 인물이 없었던 일본도 2004년 발행한 5000엔 신권에 메이지(明治)시대 때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초상을 넣었다. 일본 화폐의 첫 여성인물은 1881년 지폐에 등장한 진구(神功) 황후다.

이 밖에도 100환 지폐의 권씨처럼 일반인을 모델로 한 외국 화폐도 적지 않다. 나이지리아 10나이라 지폐에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이, 국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라오스의 100킵 지폐에는 ‘낫알을 떨어내는 여인’이 등장한다. 커피 생산지로 유명한 르완다의 5000프랑에는 ‘커피 열매를 따는 여인’이, 여성도 군에 입대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1/2리라는 오렌지가 담긴 바구니를 든 여군의 당당한 모습을 담고 있다.

북한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북한 1원권 지폐는 가극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를 모델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에 좁쌀 두 말을 빚지는 바람에 고초를 겪게 된 꽃분이 가족의 이야기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꽃 파는 처녀’는 해외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인기를 끌었다. 가극의 주인공이 화폐 도안으로 등장한 것은 화폐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초상화는 왜 오른쪽에?…화폐史 이모저모

지금껏 지폐에 그려진 인물 초상화들이 모두 오른쪽에 배치된 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의 관례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1000원권(1950년 6월12일 발행)에 등장한 뒤 신1000원·신500원권에도 새겨졌다. ‘환’으로 화폐단위를 바꾼 53년 이후 발행된 1000환과 100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때까지 이 전 대통령의 초상은 지폐 왼쪽에 있어 ‘좌이박(왼쪽 이 박사 초상화)’으로 불린다.

56년에 발행된 500환권에선 지폐 중간에 얼굴이 실리면서 ‘중이박(중앙 이 박사)’이란 별칭이 따라붙게 된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으로 경호실장과 국회의장 등이 발의해 500환권 지폐 중앙에 이 전 대통령의 초상을 실은 것이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이 ‘어떻게 내 얼굴을 마음대로 접을 수 있느냐’며 발끈하자 곧바로 개정 작업에 들어가 2년 뒤인 58년 초상화가 오른쪽(‘우이박’)으로 이동했다. 이후 60년 4·19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이승만 화폐’도 운명을 같이 했다.

지폐에 얼굴이 실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6세는 지폐 도안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초상을 지폐 도안에 실었다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마부로 변장하고 외국으로 도망치던 중 지폐에 그려진 얼굴을 알아본 농부에게 붙잡혔던 것.

화폐의 등장 인물을 결정하는데는 늘 찬·반 의견이 대립,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을 겪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1만원권 지폐다.

애초 1만원권 지폐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새기기로 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쇄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불교를 홍보하기 위함이냐” “부처님께 불경죄를 저지르는 처사다”라며 기독교계와 불교계가 집단 반발하는 바람에 지폐 모델은 ‘세종대왕’으로 바뀌었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화폐의 ‘슈퍼모델’로 통한다. 세종대왕 초상은 제2공화국 탄생과 더불어 1960년 8월 15일에 발행된 1000환권에 등장한 이후 500환권, 100원권, 1만원권에 이르기까지 50년 가까이 여러 화폐에 두루 사용됐다. 퇴계 이황이 1000원권, 율곡 이이가 5000원권에 ‘고정 모델’로 출연하는 것에 비하면 세종대왕은 화폐 단위와 액면 가치의 벽을 마음대로 넘나든 유일한 인물이다.

과거 지폐 속 율곡은 ‘얼굴’로 곤혹을 치러야 했다. 72년에 선보인 5000원권의 초상화는 콧날이 오똑하고 눈매가 날카로왔다. 당시 국내 화폐 기술이 뒤떨어져 영국에 부탁하는 바람에 영국 기술자가 서양인을 닮은 율곡을 그렸기 때문이다. 율곡의 초상화는 5년 후에 지금의 얼굴로 돌아왔다.

화폐에는 인물이나 문화유산만 들어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프랑스는 1993년에 50프랑짜리 지폐를 만들면서 전세계의 사랑을 받고있는 소설 ‘어린 왕자’의 앙증맞은 그림을 새겨넣어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이 밖에도 코끼리·사자(남아프리카공화국), 하마(부룬디), 코알라(호주), 도요새(네덜란드) 처럼 자국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화폐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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