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 위폐식별의 마지막 파수꾼 위폐감별사
106 3703 2014-01-20
‘미화 100달러 위조지폐 1만5000장 만든 일당 적발.’ ‘66조 원어치 엔화·달러 위조…간 큰 일당 검거.’

일간지 사회면에서 거의 매달 거르지 않고 올라오는 기사들이다. 위폐를 제작·유통시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위폐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큰 이상 이런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내 금융권에서 연간 확인되는 위폐 규모는 25만달러에 이른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 미국 달러 외에 중국 위안화, 유로화, 영국 파운드화, 캐나다 달러 등 다양한 국가의 위폐가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확인되는 위폐는 전체 유통량의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최소 500만달러 규모의 위폐가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카지노, 환전상 등 음지에서 유통되는 위폐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은행으로 흘러 들어오는 위폐는 ‘슈퍼노트(초정밀 위조 달러)’라 해도 정체가 탄로난다. 위폐 감별사라는 파수꾼이 있기 때문이다.

위폐 감별사는 누구새해 벽두인 지난 1월2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의 위변조대응센터에서 만난 박억선 차장은 여느 은행원과 달리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위변조대응센터 안에는 국내외 영업점에서 보내온 외화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박 차장이 건넨 명함에는 ‘위조지폐 감식전문’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박 차장은 1996년부터 위폐 감식을 해온 국내 최고 전문가다. 2007년 국가정보원의 요청으로 다른 시중은행의 외화 담당자들을 모아 위폐 감별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박 차장은 “위폐를 100% 감별할 수 있는 기계는 없다”고 말했다. 기계는 사람이 하는 일을 빠른 속도로 대신할 순 있지만 완벽하게 위폐를 걸러내진 못한다. 전 세계 감별기 중 최고인 독일제 감별기도 97~98%가량만 걸러낼 수 있다고 한다. 지폐라는 것이 사람의 손을 많이 타다 보니 찢어진 경우 테이프가 붙어 있기도 하고, 낙서가 돼 있기도 하다. 기계는 이런 지폐의 경우 위폐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기계라 해도 인간의 오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오감과 오랜 경험을 통해 지폐의 위조 여부를 판별하는 이들이 바로 위폐 감별사다.

어떤 일을 하나위폐 감별사는 국내외 영업점에서 위변조대응센터로 보내오는 모든 지폐를 검수하는 일을 한다. 서울, 경기 지역의 영업점은 일주일에 한 번, 지방 영업점은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 보유한 지폐를 위변조대응센터로 보낸다. 영업점에서도 1차적인 위폐 감별을 하지만 최종적인 관문은 위폐 감별사인 셈이다.

예전에는 지폐 실물을 직접 보고 지폐 감별기나 분석기, 확대경 등으로 위폐 여부를 확인했다. 하지만 2012년부턴 전국 영업점에 비치된 스캐너를 통해 전송된 이미지로 실시간 감별도 하고 있다. 영업점 직원이 지폐 실물을 살펴보다 이상한 점이 감지되면 본점으로 이미지 파일을 보내는 것이다. 외환은행의 경우 원화뿐 아니라 45개국의 통화를 취급하기 때문에 감별해야 할 지폐의 수가 다른 은행에 비해 더 많은 편이다.

경찰, 검찰 등 수사당국의 의뢰를 받아 위폐 감별을 하기도 한다. 박 차장은 “특히 중국에 다녀오는 분들 중 본인도 모르게 위폐를 받아오는 경우가 많다”며 “위폐 적발이 잦아질 경우 유의사항을 만들어 언론에 배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위폐 감별사는 본점을 떠나 영업점으로 나갈 경우 인천공항 지점 등 외환을 주로 다루는 영업점으로 이동한다. 일상적으로 위폐 감별 업무를 하게 되고 주기적으로 교육도 받는다.

위폐 감별 노하우는전통적인 방법은 지폐 실물의 위조방지장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원화뿐 아니라 외화에도 20~30개 정도의 위조방지장치가 들어 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0개 정도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상이 바뀌는 색변환 잉크, 홀로그램, 입체형 부분 노출 은선(3D 리본)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2013년 10월부터 한국의 5만원권과 같이 입체형 은선이 들어간 100달러짜리 신권을 발행하고 있다.

위조방지장치 확인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위폐 감별사만의 노하우는 지질과 색상 감별에서 드러난다. 지폐는 주로 면 소재로 만들어진다. 면 지폐를 치면 청명한 소리가 난다. 하지만 면 소재가 포함되지 않았거나 면 소재가 일부만 포함된 지폐는 둔탁한 소리가 난다. 또 면에 인쇄를 했을 때와 종이에 인쇄를 했을 때 색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박 차장은 “이 업무를 오래 하다 보면 영업점에서 보내온 이미지 파일만 봐도 위폐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포토샵을 잘 해도 티가 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위폐 감별사라는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은 따로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영국계 은행인 HSBC 등이 진행하는 교육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위폐 감별을 업으로 삼고 싶다면 일단 은행원이 돼야 한다. 은행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 위폐 감별사가 되는 건 아니다. 다른 은행원처럼 일반적인 업무를 거친 뒤 위폐 감별 업무를 배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된다. 이후 3~4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흰 가운을 입고 위폐 감별 업무를 전문적으로 하게 된다. 원화의 경우 한국은행, 조폐공사에도 위폐를 감별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외화까지 다루려면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에 들어가야 한다.

외환 거래량이 많은 외환은행에는 현재 30여명의 위폐 감별사가 있다. 기업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의 경우 외환은행에 비해 위폐 감별사의 수가 적다. 국내 금융권을 통틀어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셈이다. 박 차장은 “아무래도 위폐 감별사가 퇴직 후 다른 마음을 먹으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외환은행에서도 1년에 10명 정도만 육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봉은 은행에 같이 들어온 동기들과 다르지 않다. 위폐 감별 업무에 따른 별도 수당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새벽시간에 해외 영업점으로부터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 오전 8시 이전에 출근해 저녁 7~8시쯤 퇴근을 한다. 근무시간은 거의 12시간에 달하지만 다른 은행원과 달리 실적 스트레스는 없는 편이다.

위폐 감별사는 한 가지 업무에 몰두할 수 있는 치밀함과 꼼꼼함이 필요하다. 한 우물을 파는 데 적합한 스타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폐수집, 우표수집 등의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위폐 감별사에 비교적 잘 맞는 편이다. 또 하루에 몇 천만 달러씩 다루기 때문에 거액 앞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진화하는 위폐 제조 기술에 대한 연구도 필수다. 박 차장은 “위폐와 관련된 역사를 습득하고 위폐의 패턴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추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폐 감별사의 보람과 애환은보람은 역시 위폐를 발견해 범인 검거에 도움이 됐을 때 찾아온다. 2008년 부산에선 9904장(약 100만달러)의 위폐가 압수됐다. 국내에서 발견된 규모 중 최대였다. 박 차장은 “약 1만장에 이르는 위폐를 경찰이 배낭에 담아서 가져왔다”며 “러시아에서 들어온 슈퍼노트였는데 범인을 잡는 데 기여하게 돼 뿌듯했다”고 말했다.

어려운 점은 하루 종일 돈과 씨름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육체적 피로감이다. 박 차장은 “어떤 분들은 돈 만지니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돈에서 나오는 미세먼지가 장난이 아니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끼고 환경 개선 장치를 해도 먼지가 폐에 쌓여 호흡기 질환을 앓는 동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애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위폐를 감별하는 ‘마지막 파수꾼’이라는 자부심이다

경향신문 / 2014.01.08 / 김지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