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마늘밭 고액권
242 5968 2011-04-15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은 공통점이 많다. 미국 건국의 주역이다.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의 멤버이기도 하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담배전쟁이었다고 할 정도로 모두 담배 농장주였다. 그리고 지금도 지갑 속에 살아있다. 워싱턴은 1달러, 제퍼슨은 2달러, 프랭클린은 미국의 최고 고액권인 100달러의 얼굴이다. 액면가로 프랭클린은 대통령을 지낸 건국동지를 압도한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전 세계 위조지폐범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500유로는 우리돈으로 70만원이 넘는다. 지갑에 넣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운 고액권 500유로에는 ‘빈 라덴’이라는 고약한 별명이 붙었다.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처럼 몰래 돌아다니고 있지만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권 액면가로 500유로권은 시중 유로 현금의 3분의 1이나 풀렸지만, 지하로 숨어버려 보통사람은 실물을 구경하기도 힘들다. 담뱃갑 1갑에 2만달러까지 꼬깃꼬깃 숨길 수 있는 500유로 지폐는 90%가 범죄·탈세의 검은돈으로 돈다고 한다. 영국은 지난해 환전을 금지하고 ‘빈 라덴’을 퇴출했다. 500유로 지폐에 공안당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각국의 통화 가운데 세계 최고 고액권은 스위스의 1000스위스프랑이 꼽힌다. 우리돈으로 1만원짜리 100장 이상의 가치다. 물론 미국에는 10만달러짜리 초고액권도 있다고 하지만 시중에 통용되는 돈은 아니다. 싱가포르의 고액권 1만 싱가포르달러(우리돈 약 700만원)도 마찬가지다. 주요국의 고액권은 일본의 1만엔, 프랑스의 500프랑, 영국의 50파운드, 캐나다의 1000달러 등 대체로 미화 100달러, 우리돈 11만~13만원대이다. 고액권의 ‘선진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겐 우리의 5만원권은 크게 모자라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110억원의 ‘마늘밭 5만원권’ 사건으로 고액권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5만원권은 2009년 6월 이래 모두 4억200여만장이 풀려 액면가로 1만원권을 추월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야속하게도 단아한 얼굴로 세뱃돈과 축·부의금의 단위만 올려놓고 모습을 감추고 있다. 마늘밭에서 꺼낸 것만 22만장이다. ‘신사임당’이 ‘빈 라덴’ 신세다. 고액권 부작용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고액권 탓인가, 사람 탓인가. 프랭클린이 13가지 덕목을 꼽으면서 첫 머리에 올린 것은 ‘절제(節制)’다.

경향신문 원문 기사전송 2011-04-12 20:46 '오늘의 핫뉴스'
<유병선 논설위원>